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- 푸쉬킨

입력:2009-09-17 목

저 시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이런 거 였었다. 슬픔, 고통 등등 나의 모든 문제는 '나=병신장애인'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. 이 조건은 변할 수 없고 평생을 가는 것이다. 그런데 저 시의 표현대로 이 슬픔을 참고 견디면 과연 내게도 저 시가 말하는 기쁨의 날이 올까? 푸쉬킨이 어떤 환경에서 생활했는진 모르겠지만 병신, 장애인의 현실, 마음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았겠는가? 저 시는 정상인에게나 해당되는 시겠지...

그래서, 희망이 없는 나는 1행, 3행에는 나름 공감했었지만 미래의 희망을 얘기하는 2행, 4행은 공감은 커녕 "정상인에게나 해당되는 얘기겠지..."라는 박탈감에 기반하는 황량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었다. 내 경우에만 해당되는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병신, 장애인이 되면 안 좋은 것 중의 하나가 대다수가 말하는 상식이 자신에게는 상식으로 적용되지 않고 아픔으로 적용돼 세상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.(저런 시를 보고서도 그 이질감때문에 병신장애인의 가슴에는 상처가 하나 더 쌓이는 거다. 이런 게 병신장애인의 슬픔이다)

세상이 유달리 자신에게는 이렇게 이질적으로 느껴지다 보니, 이 이질감이 선사하는 박탈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키 위해 자연스레 과도한 비판력이 생길 수 밖에 없을게다. 그러다가 성격까지 극단적으로 비뚫어지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다. 이런 비뚫어짐을 완화시키는 특효약이 종교인 것 같다. 그래서 병신, 장애인과(科)의 사람들의 종교소지율이 보통사람들보다 많이 높은 것이리라. 이건 살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리라. 안 그러면 자기가 분노에 파묻혀 미쳐 버리니까.

그래도 미쳐 버리는 거는 개인만의 불행이라 다행인데, 그 증세가 정말 심하게 나오는 사람이면 정상진(자기가 살던 고시원에 불지르고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른 놈)같이, 다 죽자면서 엉뚱한 사람에게 칼부림을 하는 인간이 생겨나는 것일게다.

그래서,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라도 종교를 필히 가지는 게 사회에 좋지 않나 싶다.---유영철, 정남규, 정상진 등등도 아마도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런 사고는 치지 않았을상 싶다. 그런데 걔네들이 종교를 가졌다면 겉으로 표는 안 나지만 엉뚱한 쪽으로 더 심각한 사고를 치고 있었으려나?---물론, 그러다가 뉴라이트 계통의 수구골통의 이상한 종교에 빠지면 사회가 좀 이상한 쪽으로 퇴화하는 부작용이 있긴 하다.

어쨋든, 나는 참고 견딜려고 참고 견딘게 아니라, 죽을 용기, 당위가 없어 참고 견뎌 온건데 그러다 보니 저 시가 말한 기쁨의 날이란 게 내게도 오지 않았나 싶다. 웃긴다. 전혀 기대 안한 이런 미묘한 게 느껴지고 있는 걸 보면... '불행은 대비를 하고 있어야 그 불행이 왔을 때의 충격이 덜해지고, 행운은 기대하고 있지 않아야 그 행운이 왔을 때 크게 느껴진다'는 말이 있던데 내가 딱 그런 경우인 것 같다.

'감수성이 예민해진 사춘기 여고생들은 떨어지는 낙엽에도 웃음이 나온다'는 말이 있던데,---그런데 이 말은 옛날에 나이트에 막걸리가 나오던 시절의 여고생에나 해당되지 인터넷, 유선 방송등을 통해 온갖 자극적인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맞는 얘기는 아닌 듯---나는 지금 저보다 더 감수성이 예민해져 있는 것 같다. 온갖 것들이 내게 말을 걸어 오기 시작했으니까. 물론, 이건 아주 좁은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. 교도소 안에 있는 재소자가 거미, 칫솔이랑 대화하는 것처럼.

이유야 어쨋든간에 '나=병신장애인'의 조건이 변한 것도 아닌데도 이런 좋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고 그게 느껴지고 있는거다.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거다.---이런 게 있을 거라는 걸 기대를 안 하고 있었기에 이 사소한 차원의 좋은 것에 이렇게 큰 기쁨이 느껴지는 것이리라---"정신분열의 초기 증상이 이런 걸까나?"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어쨋든 기쁘다.

푸쉬킨이 저 시에서 말한 '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'를 이해하고 이렇게 공감할 수 있다니! 내가 이렇게 된 것도(?) 기쁘고 나의 슬픔에 갇히지 않고 푸쉬킨을 푸쉬킨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하다.

푸쉬킨을 푸쉬킨으로 인식할 수 있게 돼 감사하다고?
저것 역시도 거부를 당하고 위축되는 삶을 살아온 소수자가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, 슬픔인거다. 소수자들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명심해야 할 거다.

푸시킨이 저 시에서 말한 내용을 그냥 "어? 나랑은 좀 안 맞는 시구나"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겨 버리면 될 걸, 그 '안 맞음'이 꼭 나의 귀책사유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면서 상처를 받아 마음이 더 우울해 지는 경우가 많다는 게 소수자들의 한계, 슬픔이라는 말이다.(물론, 나만 그런 것일 수도...)

내 경우도 "푸쉬킨이 나랑 코드가 안 맞는 시를 썼네~"라고 생각 못하고, 저 시를 공감못하는 게 내 정서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었고, 이제서야 그 시를 공감하게 되는 감수성이 갖춰지니, 그 잘못이 교정된 것처럼 느껴져 이렇게 기분이 좋아진 것도 역시도 나의 한계라는 말이다. 즉, 소수자의 경우, 의식적으로 소수자쪽의 것, 즉 자기 것이 옳다고 자기최면을 건 항목이 아니고선, 저 쪽에 있는 다수자의 시각이 옳은 거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.

내처럼 이렇게 소수자가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뒤늦게라도 깨닫는 게, 안 깨닫는 것보다 낫지 싶다.(물론, 어떤 건 안 깨닫는 게 더 나을지도. 깨달음 중에는 극한의 고통을 주는 깨달음도 있으니까) 안 깨닫는 사람 중에는, 푸쉬킨의 저 시를 공감못하는 자신의 메마른 정서, 무지를 탓하기는 싫고, 다수자 무리에 속하지 못하는 소수자의 열등감, 못난 의식이 건드려지는 것도 언짢아서 "이 딴 시가 무슨 시냐? 시를 제대로 모르는 이 무식한 것들!!!"이러면서 반발심같은 무식한 방법으로 자신의 처지(?)를 보호하려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테니까.

열등감, 못난 의식이 너무 강해 자신의 그런 의식을 살펴 볼 자질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, "이딴 시가 좋다고 칭찬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수준이 정말 낮구나. 능력있는 시인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불행한 세상이 되었구나~"라는 나름 고급스러움까지 풍기는 최고조의 자기최면에 빠져 희희낙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. 물론, 이게 그 개인에겐 최대의 행복일 수도, 최대의 불행일 수도 있다는 게 인간의 오묘함인거다.(하여튼, 사람의 뇌란 놈은 이렇게 영악한 거다)

그리고, 내가 '소수자의 한계, 슬픔'이란 표현을 쓰긴 했지만 이런 표현으로 그 대상을 작은 집단으로 한정시키기 보단 '자신 속에 내재돼 있는 감추고픈 성향(장애인 기질)의 한계, 슬픔'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 것일지도 모른다. 이러면 이 얘기는 소수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얘기가 되니까.

사실상, 정상적인 인생을 포기하고 은둔형 외톨이가 된 지금도 장애인 기질이 선사하는 저런 우울함은 여전하다. 인생을 포기했으니 앞으로 내게 좋은 게 생길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. 별다른 생산적인 일을 안하는 새끼가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대한다면, 그게 미친 놈이 아니고 뭐겠는가? 고로, 저런 차원의 우울은 앞으로 심해지면 심해졌지, 줄어들진 않을 거기에 잘 버텨내야 한다는 각오만 다져진다.("이성으로는 힘들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" 이 말은 한겨레신문의 논설위원인 홍세화씨가 좋아한다던 그람시의 말인데, 너무나 맘에 드는 말이라 나도 좋아하게 됐다.)

그런데 "젊었을 적의 그 분노, 절망을 이렇게 잘 버텨 냈으니 지금 이런 미묘한 행복감을 느끼는 경지에 이르게 된 것일텐데 저까짓 걸 못 버텨낼까?"라는 요상스런 생각이 떠올라 콧웃음이 쳐지기도 한다. 저런 묘한(?) 자신감이 얼토당토않게 근거없는 것인지, 근거있는 것인지는 어쨋든 이 비루한 삶을 계속 살다 보면 분명히 알게되리라~ㅋㅋㅋ

하여튼, 내 경우에만 적용되는건진 모르겠지만, 절망, 고생은 버텨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 버텨내기만 하면 나중에 이런 엄청난 만족감을 주는 것 같다. '고생은 사서라도 해야 한다'는 말이 정말 명언인거다. 나는 '고생'이라는 자리에 '절망'을 넣는 게 더 가치가 있다고 느끼긴 하지만 말이다. '고생한다'의 차원에서 병신, 장애인이 되는 것만큼이나 고생스럽고 절망스러운 게 또 있겠는가?

가만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는 다수의 세계인 주류에 끼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고, 그렇게 해야 그게 정상이라는 마음가짐이 있는 것 같다.(포유류는 집단에서 떨어지면 떨어지는 그 자체가 스트레스라고 한다. 포유동물 중에서 최상위군에 속하는 인간은 그래서 소외되는 걸 그렇게나 두려워하고 집단에 속하려고 그렇게 부단히 노력하는거라고 해야 하리라.)

특히나 내같이 강한 결핍때문에 스스로 포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특히 더 그런 것 같다. 비슷한 수준으로 가난한 사람일지라도, 자기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과 어쩔 수 없이 가난에 처해진 사람의 행복도는 하늘과 땅차이인 것과 동일한 거다.(저건 소수자, 열등한 자의 한계라고 해야 하리라.)

하여튼 강한 결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"이 강한 결핍이 비이성적인 감정을 당연히 야기시킬 뿐만 아니라 그 비이성적 감정이 행동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"라는 걸 인지만해도, 그 강한 결핍이 행동에 부정적 영향을 못 미치게 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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